무라비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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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비트 왕조는 11세기 중엽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베르베르계 왕조로, '묶인 자들'이라는 뜻의 알 무라비툰에서 유래했다. 1040년경 종교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어,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아우르는 세력을 구축했다. 유수프 이븐 타슈핀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 살라카 전투에서 승리하며 레콘키스타를 저지했다. 그러나 알리 이븐 유수프 시대에 쇠퇴하여 1147년 무와히드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검은 깃발을 사용했으며, 말리키 학파의 영향을 받아 보수적인 이슬람 개혁 운동을 펼쳤다. 건축,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알안달루스 및 마그레브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라비트'라는 국명은 아랍어 ''''알 무라비트'''(المرابطar, al-Murabit)에서 유래했으며, 이것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알 모라비데'''(almorávidees)가 되었다. 알 무라비툰의 'b'가 알 모라비데의 'v'로 바뀌는 것은 아랍어를 스페인어로 번역할 때 일어나는 음운 변동의 한 사례이다.
1039년, 산하자족의 소부족 수장 야후야 이븐 이브라힘이 이끄는 순례단이 카이라완에서 수니파 신학자 아부 이므란 알 파시의 가르침에 공감하고, 그의 제자 이븐 야신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123] 그러나 이븐 야신의 엄격한 교리는 산하자족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결국 이븐 야신과 지지자들은 모리타니아의 세네갈 강 섬에 '라바트'(성채)를 건설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124] 이들은 "성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무라비툰"이라 불렸으며, 이것이 무라비트 왕조의 기원이 되었다.[125] 유럽에서는 스페인어식으로 알모라비드 왕조로 알려져 있다.
"알모라비드(Almoravid)"라는 용어는 아랍어 에서 유래하여 스페인어 almorávidees를 거쳐 변형되었다.[19] 는 문자 그대로 "묶는 자"를 의미하지만, 비유적으로는 "요새에서 전투 준비가 된 자"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북아프리카의 국경 수도원 요새인 ''''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20][21]
무라비트 왕조는 말리키 법학파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개혁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208] 특히 모로코의 말리키 학자 아부 임란 알 파시의 가르침은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는 초기 무라비트 왕조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209][210]
2. 국명
'알 무라비트'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구속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며, 비유적으로는 "요새에서 전투 준비가 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슬람 무장 수도원을 뜻하는 "리바트"와 관계가 있으며, 그들의 초창기 근거지였던 사하라사막 남서쪽에 위치한 리바트들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155][156][157]
국명의 직접적인 기원은 왁가그 이븐 잘루라는 말리키파 신학자가 오늘날의 모로코 남부 수스에 건설한 수도원 ''''다르 알 무라비틴'''(Dār al-Murābiṭīn, 묶인 사람들의 집)'이다. 이븐 잘루는 자신의 제자 아달라흐 이븐 야신을 보내어 아드라르(오늘날 모리타니)의 산하자 베르베르인들에게 이슬람을 전파했는데, 그 지역에 이슬람이 어느 정도 퍼진 이후 그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 함께 묶인 자들'라고 자칭했으므로 알 무라비툰이라 불리게 되었다.
무라비트인들이 언제, 어떻게, 왜 그 이름을 얻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무와히드 왕조가 정점에 도달하기 훨씬 이전인 1068년에 알안달루스의 역사가 알 바크리는 이미 이들을 알 무라비툰이라고 불렀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3세기가 지난 뒤 모로코의 역사가였던 이븐 아비 자르는 "아달라흐 이븐 야신은 아드라르(모리타니아)의 구달라 베르베르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르침에 저항하는 이들을 피해 소수의 추종자들만을 데리고 근해의 한 섬(아마도 아르긴 만의 티드라 섬)에 임시 리바트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라고 기록했다.[160]
3. 역사
무라비툰은 수도 생활과 함께 무술을 연마하며 세력 확장을 준비했다.[125] 1053-1054년, 알제리 국경 근처 아틀라스 산맥의 시질마사를 확보하면서 세력이 확장되기 시작했다.[125] 종교 지도자 이븐 야신과 세속 지도자 야후야 이븐 우마르의 지도 아래, 모로코에서 다양한 교리가 혼재된 상황에서 "알라에의 귀의와 수니파 귀속"이라는 교리가 재검토되기 시작했다.[125] 그러나 1056년 야후야 이븐 우마르, 1058년 이븐 야신이 암살되면서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가 성속을 겸하는 지도자가 되었다.[126] 1056년은 아부 바크르가 무라비툰의 지도자가 된 해로, 왕조 성립년으로 여겨진다.
무라비트 왕조는 모로코 남부 타루단트와 대서양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하고, 페즈를 중심으로 하는 베르베르 지역 세력의 저항을 “신앙의 자유” 보장 약속으로 극복했다.[127] 아부 바크르는 페즈 공략을 포함한 모로코 공략을 사촌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맡기고, 남쪽 가나 왕국 정복에 전념했다.[128] 1061년 또는 1062년경부터 가나 왕국에 지하드를 선포하여 1076년 수도 쿰비 살레를 함락시키고 조공을 받았으나,[128] 1087년 반란 진압 중 사망했다.[128]
유수프 이븐 타슈핀은 마라케시를 정비하고 모스크와 관개 시설을 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다"는 칭송을 받았다.[129] 1069년 페스를 점령하여 통합하고, 대상숙소, 물레방아, 목욕탕을 건설했다.[129]
1031년 후우마이야 왕조 붕괴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타이파로 분열되어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에 압박받고 있었다.[130] 1086년 세비야 타이파 영주의 요청으로 유수프는 알폰소 6세와 살라카 전투에서 승리했다.[131] 그러나 이슬람 공국들의 내분과 1090년 세비야의 재요청으로 1091년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점령하고, 1102년 발렌시아를 확보했다.[133] 1106년 유수프 사후에도 1110년 사라고사 점령, 1118년 톨레도 포위 등으로 세력을 과시했다.[134]
그러나 유수프 사후, 알리 이븐 유수프는 아버지와 같은 지도력이 부족했고, 1118년 아라곤 왕국에 사라고사를 빼앗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35] 안달루시아 주민들의 불만과 반란, 모로코 내 무와히드 운동 등으로 인해 타슈핀 이븐 알리, 이삭 이븐 알리 시대에 마라케시가 함락되고, 1147년 알모하드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137][138]
3. 1. 기원
무라비트 왕조의 기원은 남쪽의 세네갈 강과 북쪽의 드라 강 사이에 펼쳐진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산하자 부족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164] 무라비트 왕조의 건국 세력이자 주요 구성 부족은 람투나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는데,[165] 알 야쿠비, 알 바크리, 이븐 하우칼 등의 아랍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이들이 사하라 서남부의 주요 무역도시였던 아우다고스트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고 한다.[166][167] 프랑스의 역사학자 샤를 앙드레 줄리앙은 "무라비트 제국 기원의 핵심은 사하라 사막의 강력한 산하자 부족이었던 람투나였으며, 그들의 출신지는 모리타니의 아드라르였다"고 말했다.[163] 오늘날 사하라 서부에 광범위하게 거주하고 있는 투아레그족은 그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164][168]
람투나는 9세기 즈음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163] 이후 10세기에 통일을 이루어낸 그들은 주변 지역들,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수단에 있는 파간인들을 대상으로 여러 군사 활동을 벌였다. 왕 틴바루탄 이븐 우스페이샤르 치하에서 산하자 람투나는 사하라 종단 무역로의 주요 거점이었던 아우다고스트를 점령했다. 하지만 산하자 연맹이 붕괴되면서 아우다고스트는 가나 제국에게로 넘어갔고, 사하라 종단 무역로의 대부분은 시질마사의 제나타 베르베르 부족인 마그라와에게 빼앗겼다. 마그라와족은 또한 상황을 이용하여 수스 계곡과 드라 강 일대에 있는 목초지에서 살아가던 산하자 베르베르 부족들을 모두 추방했다. 1035년경 람투나의 족장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이븐 티파트(알리앗 타르시나)가 잠시 산하자 부족들을 재통일하려 시도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은 3년도 채 가지 못했다.
1040년, 세네갈 연안의 또다른 산하자 베르베르 부족인 구달라의 족장이자 알리앗 타르시나의 장남이었던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이 메카로의 순례길에 올랐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이프리키야에 있는 카이로완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페스 출신의 수니 말리키 학파의 법학자 겸 학자인 아부 임란 알 파시를 만났다. 당시 지리 왕조의 통치자 알 무이즈 이븐 바디스는 시아파 파티마 왕조와 결별하는 것을 공공연히 생각하고 있었으며, 카이로완의 법학자들은 그가 그렇게 하도록 선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히야와 아부 임란은 사하라 서부의 신앙 상태에 관한 대화에 빠졌고, 야히아는 그가 사는 곳의 종교 교육이 부족하며, 이슬람 율법의 태만함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다. 아부 임란의 권유로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은 모로코 남부 수스 계곡에 있는 왁가그 이븐 잘루에게로 가서 백성들을 위한 말리키 학파 출신의 학자를 찾아 나섰고, 왁가그는 그에게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인 아달라흐 이븐 야신을 추천했다.[169]
아달라흐 이븐 야신은 가줄라 베르베르 출신의 인물로서, 아마도 태생부터 무슬림이었다기 보다는 중간에 개종한 자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야신의 아들" (「쿠란」 36번째 ''수라''의 제목)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그가 과거를 지우고 무슬림으로서 새롭게 '재탄생'했음을 암시하는 증표가 될 수 있다.[170] 이븐 야신은 대단한 이슬람 광신도였는데, 그의 신조는 주로 엄격한 형식주의와 순나 전통의 빠짐없는 고수가 특징이었다.[171] 이븐 야신과 구달라와의 초기 만남은 그다지 좋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배교의 혐의로서 심문에 응했으며 사소한 범죄에도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구달라는 곧 1040년의 언젠가 그의 추종자였던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이 사망한 직후에 곧바로 그를 추방했다.
그러나 이븐 야신은 이웃한 람투나로부터 더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냈다.[171] 아마도 이븐 야신의 경건한 열정이 자신들의 단결에 유용하다는 것을 알아챈 람투나 족장 야히야 이븐 우마르는 그를 초대하여 부족들 사이에서 설교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곧 이븐 야신과 람투나는 더욱 생산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븐 야신은 선지자 무함마드의 초기 생애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정복이 이슬람의 전파를 가장 확실하게 이루어내는 방법이며, 단순히 신의 율법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슬람을 반대하는 장애물들을 모조리 분쇄해버리는 데에도 필요하리라고 역설했다. 그는 특히 부족·파벌주의를 최대의 장애물로 꼽았다. 이븐 야신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혈연을 기반으로 한 충성심과 민족적 구별에 따른 차이는 제쳐두고 성스러운 이슬람 율법에 따라 모든 무슬림들이 평등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람투나 고위층들에게 이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산하자 연맹을 재건하고 잃어버렸던 자신들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오랜 열망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1050년대 초, 야히야 이븐 우마르와 아달라흐 이븐 야신의 공동 지도 아래 람투나는 엄격한 종교적 교조주의에 입각한 교단 '알 무라비틴(무라비트파)'을 창설했으며, 수년에 걸친 포교와 세력 확장 끝에 강력한 규율을 가진 신정국가를 이뤄냈다.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은 강력한 교단 조직 외에도 새로운 군대 체제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베르베르계 부족들의 전투방식은 대개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하여 힘싸움을 벌이는 고대 그리스식 팔랑크스와 유사하였던 반면, 야히야의 새로운 군대는 마케도니아의 사리사를 연상시키는 긴 장창과 투창을 도입하였으며, 보병 위주였던 기존의 군대에 지형에 맞는 측면 공격 및 섬멸전(망치와 모루 전술)을 위해 지형에 맞는 낙타병과 기병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169]
1050년대 초, 아달라흐 이븐 야신과 람투나 족장 야히야 이븐 우마르, 그리고 그의 동생인 아부 바르크 이븐 우마르가 주도하는 삼두 정치가 등장했다. 이제 무라비트 운동은 구달라가 아닌 람투나에 의해 주도되었다. 1053년부터 무라비트 왕조는 서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들과 사하라 이남 지역으로 그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여러 베르베르계 부족들을 이기고 난 후 그들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두 가지 목표를 수립했는데, 사막의 최북단에 위치한 시질마사와 사막의 최남단에 위치한 아우다고스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시질마사는 제나타 베르베르 연맹의 일파인 마그라와족, 아우다고스트는 소닝케족의 지배 하에 들어가 있었다. 무라비트인들은 1054년 또는 1055년경에 이 도시들을 모두 정복했다. 먼저 함락당한 시질마사의 통치자 마수드 이븐 와누딘은 다른 마그라와 족장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무라비트인들은 람투나 수비대 일부를 도시에 남겨놓고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같은 해에 아우다고스트를 점령했다. 이 도시에는 무슬림들이 많았지만, 무라비트 왕조는 이곳이 이교도인 가나 왕에게 통치받고 있다는 이유로 그곳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다.
무라비트 본대가 시질마사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도망쳤던 마그라와족이 돌아와 람투나 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븐 야신은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두번째 원정대를 조직하여 대응하기로 했지만, 구달라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대서양 연안의 사막 지대에 있는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역사학자 아미라 베니슨은 구달라를 포함해 무라비트 왕조의 몇몇 베르베르인들이 북쪽의 강력한 제나타 연맹과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그 때문에 북쪽으로의 팽창을 주장하던 이븐 야신과 대립했다고 말하면서 이를 설명한다. 이븐 야신이 북부 원정을 주도하는 동안 야히야 이븐 우마르는 람투나의 심장부, 그 중에서도 주요 요충지이자 방어가 쉬운 거점이었던, 오늘날 모리타니의 아타르에서 대략 10km 정도 떨어진 자발 람투나에 머물렀다.[172][173] 그곳에는 그의 동생 야누 이븐 우마르 알 하지가 일찍이 건설한 아즈기(아조귀 또는 아즈키) 요새가 있었다.[172][174][173][175] 아틸리오 가우디오,[176] 크리스티안 바나커,[177] 브리짓 힘판과 다이앤 힘판-사파비에[178] 등의 몇몇 학자들은 아주기를 무라비트 왕조의 '첫 번째 수도'라고 주장한다. 야히야 이븐 우마르는 그뒤 1055년~1057년 사이에 구달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179]
한편, 북부에서 한창 정복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븐 야신은 야히야의 동생인 아부 바르크를 람투나의 새로운 족장으로 임명함과 함께 무라비트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그들은 곧 시질마사를 수복할 수 있었다. 1056년까지 무라비트 왕조는 모로코 남부의 타루단트와 수스 계곡 일대를 정복하고 그곳에 말리키 이슬람법을 적용했다. 그해 원정이 마무리되자 무라비트 군대는 시질마사로 회군한 뒤 그곳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 무렵 아부 바르크는 자신의 사촌인 유수프 이븐 타쉬핀으로 하여금 도시 수비대를 지휘하게 하도록 했다.
3. 2. 초기 정복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는 마라케시 건설 직후, 사하라 사막의 무역로를 위협하는 구달라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060년 또는 1071년에 남쪽 사하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아내 자이나브와 이혼하고, 떠나기 전 유수프 이븐 타시핀을 북쪽 알모라비드 영토를 담당하는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자이나브는 이븐 타시핀의 중요한 정치 고문이 되었다.
1년 후, 남쪽의 반란을 진압한 아부 바크르는 마라케시를 장악하기 위해 북쪽으로 돌아왔으나, 이븐 타시핀은 지도자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아부 바크르는 마그레브에서 이븐 타시핀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두 사람은 중립 지점에서 만나 합의를 확인했다.[11] 이후 무라비트 왕조는 이븐 타시핀이 북쪽을, 아부 바크르가 남쪽을 이끄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45] 아부 바크르는 1087년 사망할 때까지 알모라비드의 최고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이븐 타시핀은 모로코, 서사하라, 모리타니아 지역을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는 페스 주변 지역과 모로코 북부 요새와 정착지를 점령했다. 페스 정복 연대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1069년, 1070년, 또는 1074년이나 1075년으로 추정된다.
1079년, 이븐 타시핀은 틀렘센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있던 제나타 부족을 격파했다. 1081년에는 우지다를 함락시키고 틀렘센을 정복, 1082년에는 알제를 함락시켰다. 이븐 타시핀은 틀렘센을 동쪽 기지로 삼고, 타크라르트라는 새 도시를 건설했다.[49]
무라비트 왕조는 동쪽의 함마디드 왕조와 충돌했지만, 1104년에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0] 알제는 그들의 최동단 전초 기지가 되었다.[51]
1080년대,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이븐 타시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븐 타시핀은 세우타를 점령한 후(1083년 또는 1084년) 이베리아 반도에 개입했다.
이븐 타시핀은 서부 마그레브를 행정 구역으로 나누고, 중앙 정부를 발전시켰다. 신생 국가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세금과 가나의 금으로 자금을 조달했지만, 정복의 전리품에도 의존했다. 군대는 산하자 출신 병사들과 노예 친위대로 구성되었다.[52]
유수프 이븐 타시핀은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를 봉건적 지배자로 인정하고, '아미르 알-무슬리민' 칭호를 취했다.
무라비트 왕조는 모로코 남부 수스 지방의 타루단트와 대서양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점령했다. 지하드(جهاد|지하드ar)를 선포, 1076년에 가나 왕국의 수도 쿰비 살레를 함락시키고 조공을 받았다.[128]
3. 3. 전성기
유수프 이븐 타슈핀이 마라케시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마라케시 건설 시기는 1062년에서 1078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븐 이다리는 1070년을 주장하며, 현대 역사학자들도 이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1062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1060년대에서 1070년대 사이에 건설된 것은 분명하다.
아부 바크르는 1060년 또는 1071년에 사막 무역로를 위협하던 구달라와 그 동맹 세력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때 아내 자이나반은 이혼을 요구했고, 아부 바크르는 그녀를 사촌 유수프 이븐 타쉬핀과 결혼시켰다. 자이나반은 이후 유수프 이븐 타쉬핀의 중요한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북부 지역 통치를 유수프에게 맡기고 남쪽으로 떠났다.
1년 후, 아부 바크르는 돌아왔지만 유수프의 세력이 너무 강해져 그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부 바크르는 마라케시 지배권을 놓고 유수프와 싸우고 싶지 않았고, 결국 마그레브에서 유수프의 권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둘은 아그마트와 마라케시 사이에서 만나 합의를 확인했다.
이후 무라비트 왕조는 유수프 이븐 타쉬핀의 북부와 아부 바크르의 남부로 나뉘었지만, 아부 바크르는 1087년 전사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최고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일부 역사 자료에서는 두 지도자가 적대적이었고 독자적인 동전을 주조했다고 하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아부 바크르가 떠난 후,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20년 동안 마그레브 지역에서 영토를 확장했다. 아부 바크르의 아들 이브라힘은 1071년부터 1076년까지 시질마사의 통치자였으나, 1076년 유수프와 대립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무라비트 통치자 마즈달리 이븐 틸란칸의 중재로 내전은 막을 수 있었다.
이븐 타쉬핀은 뛰어난 군주로서 마라케시를 정비하고 모스크 건설과 관개 시설 개발을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다"는 칭송을 받았다. 1069년 페스를 점령하여 통합하고 성벽을 보강했으며, 대상숙소, 물레방아, 목욕탕을 건설했다.
1031년 후우마이야 왕조 붕괴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타이파로 분열되어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에 압박받고 있었다. 1086년 세비야의 타이파 영주 무타미드의 요청으로 유수프는 알폰소 6세와 살라카 전투에서 싸웠다. 무라비트 군의 북소리와 대열에 놀란 가톨릭 연합군은 패주했다. 그러나 유수프가 돌아가자 이슬람 공국들은 다시 싸움을 반복했고, 1090년 세비야의 재요청으로 1091년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점령하고, 1102년 발렌시아를 확보했다. 1106년 유수프 사후에도 1110년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1118년 톨레도를 포위하며 세력을 과시했다.
3. 3. 1. 마라케시 건설과 내부 안정
유수프 이븐 타슈핀은 모로코, 서사하라, 모리타니의 광활한 지역을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하에 두었으며, 수년에 걸쳐 페스 일대와 모로코 북부의 여러 요새와 정착지를 점령했다.[181] 주변 지역 대부분을 정복한 후, 마침내 페스를 쳐서 완전히 굴복시켰다. 유수프의 페스 정복 시기는 1069년,[181] 1070년 3월 18일,[182] 혹은 1074~1075년 사이[181]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1079년,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마라케시에서 2만 명의 군대를 틀렘센으로 보내어 그 지역을 점령한 제나타 부족인 바누 얄라를 공격하게 했다. 무라비트 군대는 바누 얄라를 격파했으나, 우지다의 저항이 강력하여 틀렘센 점령은 어려웠다. 1081년, 이븐 타쉬핀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우지다를 점령하고 틀렘센까지 정복했다. 1082년에는 알제가 정복되었다. 이후 이븐 타쉬핀은 틀렘센을 동방 진출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184]
이븐 타쉬핀은 동쪽에서 함마드 왕조와 여러 차례 충돌했지만, 마그레브 중부 정복에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185][186] 1104년, 이븐 타쉬핀은 함마드조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알제가 무라비트 왕조의 최동단 거점이 되었다.[185][186]
이븐 타쉬핀은 무라비트 왕조의 행정 구역을 정비하고, 마라케시에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주요 지방은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이나 친척들에게 맡겨 통치했다. 경제적으로는 약탈이나 전리품에 국가 경제의 대부분을 의존했다. 군대에는 흑인 병사 5,000명과 백인 병사 500명을 포함한 왕실 친위대를 육성하고 노예들을 대량으로 사들여 병사로 훈련시켰다.[187]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바그다드의 아바스조 칼리파를 명목상의 군주로 인정하여 무라비트 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했다. 1073~1074년 사이, 이븐 타쉬핀은 아바스 칼리파로부터 '아미르 알 무슬리민(amīr al-muslimīn|무슬림들의 사령관ar)' 칭호를 받았다. 아바스 칼리파의 공식적인 인정은 1090년대까지 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3. 2. 마그레브 정복
이븐 타쉬핀은 현재의 모로코, 서사하라, 모리타니아 지역을 알모라비드 왕조의 지배하에 두는 데 기여했다. 그는 페스 주변 지역과 모로코 북부의 요새와 정착지를 점령하는 데 수년을 보냈다.[46][47] 주변 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후에야 비로소 페스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복의 정확한 연대기에 대해서는 역사적 자료들 사이에 상반되고 불확실한 부분이 있는데, 어떤 자료는 주요 정복 시기를 1060년대, 다른 자료는 1070년대로 언급하고 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페스의 최종 정복 연도를 1069년(히즈라력 461년)으로 제시한다. 역사가 로널드 메시어는 보다 구체적으로 1070년 3월 18일(히즈라력 462년)로 언급한다. 다른 역사가들은 이 정복을 1074년 또는 1075년으로 추정한다.
1079년, 이븐 타쉬핀은 마라케시에서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현재의 틀렘센으로 진격,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제나타 부족인 바누 야알라를 공격했다. 마즈달리 이븐 틸란칸이 이끄는 군대는 무라야 강 계곡 부근에서 바누 야알라를 격파하고 그들의 지휘관이자 틀렘센 통치자의 아들인 몰리 이븐 야알라를 처형했다. 그러나 이븐 틸란칸은 바니 이즈나산이 점령하고 있던 우지다 시가 너무 강력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즉시 틀렘센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븐 타쉬핀 자신이 1081년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우지다를 함락시킨 후 틀렘센을 정복하고 그곳의 마그라와 군대와 그들의 지도자 알-압바스 이븐 바크티 알-마그라위를 학살했다. 그는 계속 진격하여 1082년에는 알제를 함락시켰다. 이븐 타쉬핀은 그 후 틀렘센을 자신의 동쪽 기지로 삼았다. 당시 그 도시는 아가디르라는 오래된 정착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븐 타쉬핀은 그 옆에 타크라르트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고, 이 도시는 후에 알모하드 왕조 시대에 아가디르와 합쳐져 현재의 도시가 되었다.[49]
알모라비드 왕조는 그 후 동쪽의 함마디드 왕조와 여러 차례 충돌했지만, 중부 마그레브를 정복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고 다른 전선에 집중했다.[50][51] 결국 1104년에 함마디드 왕조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0] 알제는 그들의 최동단 전초 기지가 되었다.[51]
3. 3. 3. 무라비트 남부와 가나 제국
유수프 이븐 타쉬핀을 북부의 통치자로 두고 남쪽으로 돌아온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는 아주기를 거점으로 삼아 제국의 남부 지역을 평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 도시는 아부 바크르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는 남부 무라비트조의 수도 역할을 했다.[188][189][174][190][173][191] 다른 지역에서 무라비트 왕조로 향하는 사하라 사막 무역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남부의 역사는 아랍 사료들에는 잘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마그레브와 알안달루스의 역사에서는 때때로 소외되기도 한다. 또한 더 많은 사료들이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고고학적 발견과 그 성과만에 역사를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면서 무라비트 왕조에 대한 현대 역사가들의 의견을 엇갈리게 한 것 역시 문제이다. 사헬 지대에서 무라비트 왕조가 확실하게 존재했으며 그곳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는 주장은 오늘날 아프리카에 대한 연구에 가장 강력하게 다루어지는 논의 중 하나이다.
아랍 사료에 따르면 아부 바크르의 지휘 아래 무라비트 왕조는 1076~1077년경 소닝케족이 세운 가나 제국을 정복했다.[189] 이에 대해 아랍 역사학자 이븐 칼둔이 가나의 법학자인 샤이크 우스만의 발언을 인용하여 1394년에 쓴 기록이 남아있다. 말리 지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이야기에 따르면 소쏘족의 통치자 수마우로 캉테가 이 땅을 점령했다고 한다.[193] 한편 아랍 지리학자 이븐 쉬하브 알 주히리는 무라비트 왕조가 1084년 타드메카에서 그 지역에 만연해있던 이바드파 이슬람을 끝장냈으며 그 지도자 아부 바크르가 깊은 남쪽의 "황금의 산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199]
그러나 콘라드와 피셔의 연구(1982)는 무라비트 군사 정복의 핵심 개념은 아랍측 사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나 순진하게 의존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며 이를 비판했다.[194] 티모시 인솔 교수는 "고대 가나를 고고학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무라비트 왕조의 군사적 침공에 따른 급격한 변화와 파괴의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며 이를 덧붙혔다.
디어케 랑게는 기존의 군사 침공 이론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설명하면서 가나 제국 멸망의 주요 요인이 다른 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라비트 왕조의 종교적인 영향력은 군사 정복의 결과라기보다는 비교적 점진적이었으며, 그곳의 토착 귀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고 권력을 얻어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고대 가나의 쇠퇴가 무라비트 왕조의 침공과 이슬람의 압력으로 촉발된 것은 맞지만 군사적인 정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왕위 계승 분쟁과 같은 여러 내부 요인들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195]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해석은 셰릴 부르할터와 같은 후기 역사학자들에 의해 논란이 되었는데,[196] 그는 사하라 남쪽에서 이루어진 '정복'의 성격이 무엇이든 간에 서아프리카의 금을 확보하고 유통하는 데 있어 무라비트 왕조의 영향력과 성공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197]
아부 바크르는 1087년 11월 전투 중 화살[198]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결국 타간트에서 사망했다. 아부 바크르 사후, 기존에 가나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사하라 사막의 베르베르인들은 아부 바르크의 후손과 그의 동생 야히야에게 분열되어 그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을 것이다.[199] 셰릴 부르할터는 아부 바크르의 아들이 1076년 가나를 정복한 무라비트 원정의 지도자였으며, 나중에 무라비트 왕조가 가나를 상실하고 무와히드 세력에 의해 마그레브에서 멸망당하는 12세기 말까지 살아남아 사하라 남부를 통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96]
무라비트 왕조는 1061년 또는 1062년경부터 가나 왕국에 대해 지하드를 선포하여, 1076년에 수도 쿰비 살레를 함락시켜 지배하고, 그 근처에 사는 셀레족에게 조공을 받았다.[128] 이후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에 나섰으나, 1087년에 사망했다.[128]
3. 3. 4. 알 안달루스로의 확장
11세기 초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해체된 후, 알안달루스는 타이파라 불리는 작은 왕국이나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서로 끊임없이 싸웠지만 자체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육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에게 군사력을 의존했다. 기독교 왕국들은 타이파 국가들끼리 전쟁을 벌일 때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대신 조공을 바치거나 침공하지 않는 대가로 금화를 받았다. 이로 인해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영토는 점진적으로 기독교 세력에게 잠식당했다. 조공을 바치기 위한 과도한 세금과 관세는 백성들의 불만을 샀지만, 조공을 중단하면 기독교 국가들의 징벌적 원정과 정복이 뒤따랐다. 타이파 통치자들은 서로 단결하지 않았고, 가장 강력한 타이파인 세비야조차도 기독교 세력의 진격에 속수무책이었다.[155]
1031년 후우마이야 왕조 붕괴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타이파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다가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에 압박을 받고 있었다.
1083년, 무라비트 왕조는 지브롤터 해협 남쪽 해안의 세우타를 점령하여 알안달루스 개입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같은 해, 카스티야-레온의 군주 알폰소 6세는 세비야 타이파 알 무타미드에 맞서 남부 알안달루스로 군사 원정을 이끌었고, 타리파까지 도달했다. 1085년 5월, 알폰소 6세는 톨레도를 무너뜨리고 사라고사를 위협했다.
1086년, 세비야의 타이파 영주 무타미드의 구원 요청에 따라 유수프는 출병하여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와 살라카 전투에서 싸웠다. 무라비트 군의 북소리와 대열에 놀란 가톨릭 연합군은 패주하였다.
타이파 통치자들은 무라비트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알 무타미드는 바다호스의 알 무타와킬, 그라나다의 압달라 이븐 불루긴과 함께 무라비트 왕조에게 사절을 보냈다. 이들은 무라비트 왕조의 개입에 따른 위협을 알고 있었지만,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다. 알 무타미드는 "돼지의 우리(알폰소)보다는 낙타의 목초지(이븐 타쉬핀)가 되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알헤시라스를 점령하고, 1086년 7월 알헤시라스에 5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12,000명이 넘는 무라비트 군대가 뒤따랐고, 이븐 타쉬핀은 세비야의 알 무타미드, 알 무타와킬, 압달라 이븐 불루긴과 합류했다. 알폰소 6세는 사라고사 포위를 풀고 남하하여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격돌했다.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기독교 군세를 대파하고 알폰소 6세를 패주시켰다. 알 무타미드는 여세를 몰 것을 권했지만, 이븐 타쉬핀은 세비야를 거쳐 북아프리카 본토로 돌아갔다.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떠나자, 알폰소 6세는 다시 타이파들에 대한 압박을 재개하고 알레도 요새를 함락시켰다. 알안달루스의 엘리트들은 무라비트 왕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1088년 5월 6일, 이븐 타쉬핀은 알헤시라스에 상륙하여 타이파 군대와 합류, 알레도 탈환에 돌입했으나 실패하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1090년,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다시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 타이파들을 합병하기 시작했다. 그는 타이파 통치자들이 종교적으로 해이해졌다고 주장하며 말리키파 율법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았다. 1090년 6월, 이븐 타쉬핀은 그라나다를 비롯한 타이파 통치자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알 무타미드는 알폰소 6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1091년 초 무라비트 왕조는 코르도바를 장악하고 세비야로 진격하여 알 무타미드를 사로잡았다. 그해 말, 알메리아도 항복했다. 이듬해 1월, 유수프 이븐 타쉬핀의 아들 이븐 아이샤가 무르시아를 항복시켰다.
1090년 세비야에서 다시 구원 요청이 오자 알안달루스의 이슬람 여러 공국은 진정한 성전을 완수하려면 무라비트 왕조 자체의 지배가 필요하다는 동기에 힘입어, 1091년 이전 동맹국이었던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점령하고 세비야의 알무스타미드를 몰아냈으며, 1102년 발렌시아를 확보하였다. 1106년 유수프가 죽은 후에도, 1110년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1118년 톨레도를 포위 공격하여 그 세력을 과시하였다.
무르시아 함락으로 알모라비드 왕조는 발렌시아에 도달했다. 1092년 10월, 엘 시드가 없는 사이 발렌시아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알모라비드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엘 시드의 귀환으로 실패했다. 엘 시드는 발렌시아 공성전을 시작했고, 1094년 6월 15일 발렌시아에 재입성하여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1094년, 알모라비드는 바다호스 타이파 왕국을 장악했다. 이후 발렌시아로 눈을 돌렸지만, 엘 시드에게 패배했다. 엘 시드는 1096년, 1097년에도 알모라비드의 공격을 격퇴했다.
1097년, 유수프 이븐 타시핀은 알안달루스로 진군하여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대를 격파했다. 엘 시드의 아들 디에고가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알바르 파네스도 쿠엥카 근처에서 패배했다.
엘 시드는 1099년 7월 10일 사망했고, 그의 아내 히메나가 왕국을 책임졌다. 1102년 초, 마즈달리가 발렌시아를 포위하자 히메나는 알폰소 6세의 도움으로 대피했고, 알모라비드가 도시를 점령했다.
같은 해 발렌시아 함락을 축하하며 유수프 이븐 타시핀은 아들 알리 이븐 유수프를 상속자로 인정했다. 이븐 타시핀이 1106년에 사망할 무렵, 알모라비드는 사라고사를 제외한 모든 알안달루스를 장악했지만, 이전 세기에 기독교 왕국에 빼앗긴 땅을 재정복하지는 못했다.
3. 3. 5. 거듭되는 알안달루스에서의 일진일퇴
무르시아를 점령하면서, 무라비트 왕조는 이전 톨레도 타이파 알 카디르의 지배 하에 있었던 발렌시아 역시 점령할 수 있었다. 알 카디르는 1086년 카스티야 왕국이 톨레도를 장악함에 따라 발렌시아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사실상 허수아비 군주였다.[135] 알 카디르의 인기 없는 통치는 곧 카스티야 귀족이자 용병대장이었던 엘 시드(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의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결국 그에게 도시를 빼앗겼다. 1092년 10월, 엘 시드가 도시를 잠시 떠나 있는 틈을 타서 발렌시아의 무슬림 재판관(카디) 아부 아흐마드 자파르 이븐 자하프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븐 자하프는 무르시아에 있던 무라비트 왕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무라비트 왕조는 소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그를 지원했다. 카스티야 수비대는 모두 추방되었으며 알 카디르는 사로잡힌 뒤 처형되었다.[136][137]
그러나 무라비트 왕조는 엘 시드가 돌아와서 공성전을 시작할 때 이를 방어할 만큼의 충분한 병력을 보내지 못했으며, 이븐 자하프는 또 다른 타이파 통치자처럼 행동하면서 신민들의 원성을 샀다.[138][139] 엘 시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발렌시아 공성전을 시작했다. 그는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 뒤, 인근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변의 농작물을 모두 거두어들이면서 안의 수비대를 말라죽이려 했다. 그러자 이븐 자하프는 엘 시드와 협상하여 다시 그가 도시의 지배자가 되는 것에 합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도시 안에 있던 무라비트인들은 사실상 엘 시드의 포로가 되었다.[140] 1093년 9월, 유수프 이븐 타쉬핀의 조카인 아부 바크르 이븐 이브라힘이 이끄는 구원군이 발렌시아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엘 시드와 교전을 벌이지 않은 채로 회군했다.[141] 이븐 자하프는 엘 시드와의 협상을 계속 이어갔지만 이는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됐고 포위 공격은 계속되었다.[142] 1094년 4월, 도시는 극심한 기아에 고통받고 있었으므로, 결국 이븐 자하프는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엘 시드는 꼭두각시 무슬림 통치자를 내세우는 것 대신에 자신이 직접 도시를 통치하기로 마음먹었다.[143]
한편, 1094년에 무라비트 왕조는 타이파-카스티야 연합군을 격파하고 바다호스 전역을 장악했다.[144] 이 무라비트 군대는 세비야 총독으로 임명된 시르 이븐 아부 바크르가 이끌었다.[145] 시르 이븐 아부 바크르는 발렌시아로 관심을 돌려 이븐 타쉬핀의 또 다른 조카인 무함마드 이븐 이브라힘에게 발렌시아를 함락시키라는 명을 내렸다.[146][147] 1094년 10월, 무함마드는 발렌시아 성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엘 시드가 수비를 성공적으로 해내는 한편, 다른 성문에서 출진하여 무라비트 군대의 잘 방어되지 않은 부분을 공격하는 양면 전술을 시도하면서 발렌시아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알안달루스로의 진출 이래로 무라비트 왕조가 당한 첫 번째 패배였다.[148] 승리 직후, 엘 시드는 배신에 대한 보복으로 이븐 자하프를 길거리에서 산 채로 불태워 처형시켰다.[149]
엘 시드는 무라비트 왕조의 추가 공격을 예상하여 도시로 향하는 남쪽 길목에 요새들을 추가로 건설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보강했다.[150] 1096년 말, 이븐 아이샤가 이끄는 30,000명의 무라비트 군대가 이 요새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페냐 카디엘라(사티바 남쪽)를 포위했다.[151] 엘 시드는 이들과 대치하면서 아라곤에 도움을 요청했다. 증원군이 도착하자 무라비트 왕조는 포위망을 풀었지만, 엘 시드의 군대가 발렌시아로 진군할 때 지나치는 곳에 함정을 팠다. 그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 좁은 협곡에서 매복 전술을 펼쳤는데, 엘 시드는 군대를 수습하여 이를 겨우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152] 1097년, 무라비트 왕조의 사티바 총독인 알리 이븐 알 하지는 발렌시아 영토에 대한 또 다른 침공을 이끌었지만 빠르게 패배하고 알메나라로 후퇴했다. 엘 시드는 여세를 몰아 알메나라를 3달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다.[153][154]
1097년,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안달루스로 진격, 무함마드 이븐 알하지를 야전 사령관으로 삼은 뒤 코르도바에서 출진하여 알폰소 6세를 콘수에그라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이때 엘 시드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디에고가 전사했다.[155] 알폰소 6세 휘하의 장군인 알바르 파네즈 역시 얼마 뒤 이븐 아이샤가 이끄는 무라비트 군대에게 쿠엥카 인근에서 패배했다. 무라비트 군대는 엘 시드가 보낸 다른 군대도 격파하고 발렌시아 인근 지역을 황폐화시켰다.[156] 다만 무라비트 측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중요한 도시나 요새들은 점령하지 못했다.[157]
엘 시드는 점령한 발렌시아에 기독교 정책을 펼쳐, 모스크들을 교회로 개조하고 교구를 설치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이곳을 기독교화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새로운 기독교 정착민들을 발렌시아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했다.[158] 엘 시드는 1099년 7월 10일에 아내 히메나에게 발렌시아를 남겨준 채 사망했다. 그러나 히메나는 1102년 초봄에 무라비트 사령관 마즈달리가 이끄는 대규모 침공을 막을 능력이 없었다. 그해 4월에서 5월 사이, 히메나 및 대다수의 기독교도는 알폰소 6세의 도움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무라비트 왕조는 이들이 떠난 이후에 발렌시아를 점령했다.[159][160]
같은 해에 유수프 이븐 타쉬핀은 아들 알리 이븐 유수프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선언했으며 이를 널리 알려 축하했다.[161] 알안달루스 내에서 유일하게 합병당하지 않은 사라고사 타이파 통치자는 이에 사절단을 파견하고 무라비트 왕조에게 복속을 청했다.[162] 1106년 이븐 타쉬핀이 사망했을 때 무라비트 왕조는 사라고사를 제외한 알안달루스 전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은 지난 세기 동안 기독교 세력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려 들지는 않았다.[163]
3. 3. 6. 알리 이븐 유수프 재위 초기
알리 이븐 유수프는 세우타에서 태어나 안달루스의 전통 속에서 교육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알리 이븐 유수프가 사막 생활을 잊고 도시의 안락함을 선택한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를 대표한다고 보았다.[65] 그의 37년에 달하는 긴 통치는 1118년 이전 초기 10년 정도는 숙련된 장군들 덕분에 지속적인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후년의 패배와 악화되는 상황에 가려져 있다. 무라비트 왕조는 야전 전투에서는 계속 우세했지만, 장기간의 포위 공격을 지속하고 승리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무능하여 군사적 결점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 초기 몇 년 동안 무라비트 왕국은 매우 부유했고 이전보다 더 많은 금화를 주조했으며, 알리 이븐 유수프는 특히 마라케시에서 야심찬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즉위하자 알리 이븐 유수프는 페스 총독인 그의 조카 야히야 이븐 아부 바크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라비트 신하들로부터 새로운 통치자로 받아들여졌다. 알리 이븐 유수프는 군대를 페스 문까지 행군하여 야히야가 틀렘센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곳에서 베테랑 무라비트 사령관 마즈달리는 야히야를 설득하여 삼촌과 화해하게 했다. 야히야는 동의하여 메카로 순례를 떠났고, 귀환 후 마라케시의 알리 이븐 유수프 궁정에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알리 이븐 유수프는 1107년 그의 통치 기간 중 처음으로 안달루스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의 무라비트 행정부를 조직하고 그의 형제 타밈을 그라나다를 행정 수도로 하여 전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안달루스에서의 첫 번째 주요 공격은 1108년 여름에 일어났다. 무르시아와 코르도바 출신 군대의 지원을 받은 타밈은 톨레도 동쪽의 작은 요새 도시 우클레스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알폰소 6세는 베테랑 알바르 파네스가 이끄는 구원군을 보냈지만 1108년 5월 29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패했다. 알폰소 6세에게는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산초가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더욱 나쁜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 후, 카스티야인들은 쿠엥카와 우에테를 버렸고, 이는 톨레도에 대한 무라비트의 침략을 가능하게 했다.
1109년 여름, 알리 이븐 유수프가 직접 원정을 이끌고 건너왔다. 6월 알폰소 6세의 죽음은 무라비트에게 또 다른 이점을 제공했을 것이다. 톨레도 서쪽의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는 8월 14일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톨레도 자체는 알바르 파네스의 지휘하에 저항했다. 도시의 강력한 방어를 극복할 수 없었던 알리 이븐 유수프는 결국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한편, 사라고사의 타이파 왕인 알-무스타인 2세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상반되는 압력에 직면했다. 이전의 타이파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 왕국에 파리아스(조공)를 계속 지불했지만, 도시 내부의 여론은 이 정책에 반대했고 무라비트를 점점 더 지지했다. 이러한 여론을 달래기 위해 알-무스타인은 아라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1110년 1월 발티에라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마드 알-다울라는 그의 권위를 확립할 수 없었고, 반란의 위협에 직면하여 도시를 탈출했다. 알리 이븐 유수프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무함마드 이븐 알-하지에게 사라고사 점령 임무를 맡겼다. 1110년 5월 30일, 이븐 알-하지는 거의 저항 없이 도시에 진입하여 마지막 독립 타이파 왕국을 종식시켰다.
무라비트는 그 후 몇 년 동안 계속 공세를 펼쳤지만, 그들의 최고 장군들 중 일부가 이 기간 동안 사망했다. 1111년, 시르 이븐 아부 바크르(세비야 총독)는 서쪽에서 원정을 벌여 리스본과 산타렘을 점령하고 타구스 강을 따라 국경을 확보했다. 무함마드 이븐 알-하지는 동쪽에서 계속 활동했다. 1112년 우에스카에 대한 그의 원정은 이슬람군이 피레네 산맥 근처에서 작전을 수행한 마지막 시기였다. 1114년, 그는 카탈루냐에서 원정을 벌이고 발렌시아의 이븐 아이샤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을 습격했다. 그러나 귀환 도중 무라비트는 매복 공격을 받았고 두 사령관 모두 사망했다. 1113년 말 시르 이븐 아부 바크르가 사망했다. 1115년에는 유수프 이븐 타슈핀 가족의 가장 베테랑이자 충실한 동맹국 중 한 명인 마즈달리가 코르도바 총독으로 복무하던 중 북쪽에서 원정을 벌이다 전투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사망은 무라비트에게 고위급 유능한 사령관의 큰 손실을 의미했다.
1115년, 사라고사의 새로운 총독 아부 바크르 이븐 이브라힘 이븐 티필윗은 라몬 베렌게르 3세 백작이 마요르카에 있는 동안 바르셀로나를 27일 동안 포위했다. 백작이 돌아오자 포위 공격을 해제했지만, 같은 해에 무라비트는 카탈루냐인과 피사 공화국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했다. 마지막 현지 이슬람 통치자 무바시르 알-다울라가 사망한 후 무라비트는 아무런 싸움 없이 마요르카를 점령했다.
알리 이븐 유수프는 코임브라 공격을 이끌기 위해 1117년 세 번째로 안달루스에 건너갔다. 그러나 짧은 포위 공격 후 그는 철수했다. 그의 군대는 세비야로 돌아가는 길에 약탈을 하고 상당한 전리품을 얻었지만, 이는 무라비트의 주도권이 고갈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후였다.
3. 4. 쇠퇴와 멸망
1117년 이후 무라비트 왕조의 운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알폰소 6세 사후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다른 기독교 왕국들은 무라비트 왕조의 영토를 빼앗아 확장할 기회를 포착했다.[201] 1118년 아라곤 왕국의 왕 알폰소 1세는 프랑스 십자군 가스통 드 베른의 도움을 받아 사라고사를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201] 5월 22일에 시작된 사라고사 포위 공격은 제대로 된 증원이 도착하지 않은 채 12월 18일에 항복으로 끝났다.[201] 알리 이븐 유수프는 이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1120년 쿠탄다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201]
이 위기는 무라비트 군대가 광대한 영토에 걸쳐 과도하게 확장되었다는 증거이다.[201] 1118년 초 사라고사의 무라비트 총독 압드 알라 이븐 마즈달리가 사망했을 때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았고, 포위 공격 전에 도시에 남아 있던 무라비트 수비대는 매우 소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201] 유수프 이븐 타슈핀은 이 문제를 이해하고 14세기 연대기인 『훌룰 알 마우시야』의 익명의 이야기에서처럼 사라고사를 무라비트 왕조와 기독교 세력 사이의 완충국으로 남겨둘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이야기는 이븐 타슈핀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에게 이 정책을 따르라고 조언했다고 전한다.[201] 알폰소 1세가 1118년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1137년 아라곤이 카탈루냐 백국과 통합되면서 아라곤 왕국은 이 지역의 주요 기독교 세력으로 변모했다. 서쪽에서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가 독립적인 권위를 주장하며 사실상 포르투갈 왕국을 건국했다. 이러한 왕국들의 성장하는 힘은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이 직면한 정치적 어려움을 더욱 심화시켰다.[201]
이러한 엄청난 역전은 적어도 알안달루스에서는 무라비트 왕조에 대한 대중적 지지의 감소를 초래했다. 안달루스 사회는 공격적인 기독교 왕국들을 막아낼 수 있다는 이해 하에 무라비트 왕조와 대체로 협력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자 그들의 권위는 점점 공허해졌다.[201] 그들의 정통성은 조세 문제로 인해 더욱 약화되었다. 초기 무라비트 통치의 주요 매력 중 하나는 비정규 세금(즉, 꾸란에서 허용하지 않은 세금)을 없애 백성의 주요 재정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꾸란에 따른 세금만으로는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여러 적과 싸우는 무라비트 군대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알리 이븐 유수프는 무라비트 왕조가 영토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비정규 세금을 다시 도입해야 했다.[201]
이러한 발전이 1121년 코르도바에서 반란을 촉발했을 수 있다. 무라비트 총독은 그의 궁궐에 포위되었고, 반란이 너무 심각해져 알리 이븐 유수프는 직접 안달루스로 건너가 진압해야 했다. 그의 군대는 코르도바를 포위했지만 결국 무라비트 총독과 주민 사이에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201] 이것은 알리 이븐 유수프가 안달루스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때였다.[201]
아라곤의 알폰소 1세는 1120년대에 무라비트 왕조에 더욱 치욕적인 타격을 가했다. 1125년 그는 동쪽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그라나다에 도착했지만 (포위 공격은 하지 않았지만) 코르도바 주변 농촌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1129년에는 발렌시아 지역을 침략하여 그를 저지하려는 군대를 물리쳤다.[201] 안달루스에서 무라비트 왕조의 입지는 113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1129년 알폰소 1세의 공격에 이어 알리 이븐 유수프는 그의 아들(그리고 후계자)인 타슈핀 이븐 알리를 안달루스로 보내 군사 조직을 재편성했다. 그의 통치는 그라나다, 알메리아, 코르도바를 포함하게 되었고, 사실상 수년 동안 안달루스 총독이 되어 능숙하게 통치했다.[201]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 가문과 친척 관계인 바누 가니야 씨족도 이 시기에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야히야 이븐 알리 이븐 가니야는 1133년까지 무르시아 총독이었고, 그의 형제는 1126년 이후 발레아레스 제도의 총독이었다. 113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타슈핀과 야히야는 무라비트 군대를 이끌고 기독교 세력에 대해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일부 도시들을 탈환했다.[201] 가장 중요한 승리는 1134년 프라가 전투였는데, 야히야가 이끄는 무라비트 군대가 작은 무슬림 마을 프라가를 포위한 아라곤 군대를 물리쳤다. 특히, 알폰소 1세 엘 바탈라도르는 부상을 입고 얼마 후 사망했다.[201]
무라비트 왕조의 권위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마그레브에서 온 알모하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120년대에 이븐 투마르트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의 사망(약 1130년) 후 후계자인 압드 알 무민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들은 마라케시 남쪽의 높은 아틀라스 산맥에 있는 틴말에 기지를 설립했고, 여기에서 점진적으로 무라비트 왕조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201] 알모하드와의 싸움은 무라비트 왕조의 자원을 엄청나게 소모시켰고, 안달루스를 포함한 다른 지역의 인력 부족에 기여했다. 또한 현재 모로코에 있는 무라비트 왕조의 중심지에 타스기무트 요새와 같은 대규모 요새를 건설해야 했다.[201] 알리 이븐 유수프의 명령으로 1126년 수도 마라케시에 처음으로 마라케시 성벽이 건설되었다.[201] 1138년 그는 알모하드와의 싸움을 돕기 위해 아들 타슈핀을 마라케시로 소환했다. 안달루스에서 그를 제거한 것은 무라비트 왕조의 안달루스 내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201]
1138년 무라비트 왕조는 알폰소 7세에게 패배했다. 우리케 전투(1139년)에서 그들은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에게 패배하여 그의 왕관을 빼앗겼다. 1140년대에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201]
1143년 알리 이븐 유수프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타슈핀 이븐 알리는 알모하드 앞에서 빠르게 영토를 잃었다. 1146년 그는 오랑 근처에서 패배한 후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201] 수피 신비주의자 이븐 카시의 지휘 아래 1144년 무리둔이 이베리아 반도 남서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알모하드에 합류했다. 리스본은 1147년 포르투갈에 의해 정복되었다.[201]
타슈핀의 두 후계자는 이브라힘 이븐 타슈핀과 이삭 이븐 알리였지만, 그들의 통치는 짧았다. 1147년 알모하드에 의한 마라케시 정복은 왕조의 몰락을 의미했지만, 무라비트 왕조의 일부 세력은 제국 전역에서 계속 저항했다.[201] 이러한 세력 중에는 마라케시 함락 후 8년 동안 마그레브에서 알모하드의 지배에 저항하다가 1155년 항복한 반란군 야히야 알 사흐라위야가 있었다.[201] 또한 1155년 남은 무라비트 왕조는 바누 가니야의 지휘 아래 발레아레스 제도와 이후 이프리키야로 후퇴했는데, 그들은 결국 마그레브 동부에서 정복자 알모하드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201]
유수프가 죽자 그 뒤를 이은 알리 이븐 유수프(재위: 1107년 - 1142년)는 아버지 재위 시절부터 정치에도 참여했던 까닭에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우타에서 태어나 안달루시아의 이슬람 문화에 물들었던 그는 아버지와 같은 지도력이 없었고, 법학자들에게 이용당하며 기도와 독서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135]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무라비트 군은 1118년에 아라곤 왕국에 사라고사를 빼앗기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에게도 원정군을 파견당해 후퇴를 강요당했다.[135]
이러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를 환영했던 안달루시아의 이슬람교도 주민들도 무라비트 군의 폭력과 문화적 무지에 질려 불만이 폭발하여 반 무라비트 운동이 일어났고, 코르도바, 무르시아, 발렌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35] 또한 모로코 국내에서도 무와히드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안달루시아의 이슬람 여러 제후국들은 무와히드 세력과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타슈핀 이븐 알리(재위: 1142년 - 1146년), 그리고 이어서 이삭 이븐 알리(재위: 1146년 - 1147년) 시대에 수도 마라케시는 함락되었고, 마침내 1147년 알모하드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137][138]
4. 상징
"알모라비드"라는 이름은 오늘날 모로코의 수스 알 악사에 와가그 이븐 잘루 알람티(Waggag ibn Zallu al-Lamti)라는 학자에 의해 설립된 "다르 알 무라비틴(Dar al-Murabitin)"이라는 말리키 법학 학파와 관련이 있다. 알모라비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 결합된 자들의 집"인 다르 알 무라비틴의 추종자들에서 유래한다.
알모라비드가 언제 어떻게 그 명칭을 얻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알 바크리(Al-Bakri)는 이미 그들을 ''알 무라비툰(al-Murabitun)''이라고 불렀지만, 그 이유는 명확히 하지 않았다. 이븐 아비 자르(Ibn Abi Zar)는 압달라 이븐 야신(Abdallah ibn Yasin)이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해안 섬에 임시 ''리바트''(수도원 요새)를 세웠기 때문에 그 이름을 선택했다고 제안했다.[22][23] 이븐 이드하리(Ibn 'Idhari)는 그 이름이 특히 힘든 전투 후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이븐 야신이 제안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어떤 설명이 사실이든, 그 명칭은 알모라비드 자신들이 선택한 것으로 보이며, 부분적으로는 어떤 부족이나 민족적 정체성을 방지하려는 의식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알모라비드 왕조는 정치·군사 운동뿐 아니라 종교적·정치적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해 검은 깃발을 채택했다. 이는 압바스 칼리파와의 연관성을 통해 입증되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검은색은 "불경과 오류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깃발을 상징하기도 했다.[66] 하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수니파 이슬람의 최고 종교 및 세속 권위자로 여겨지는 압바스 칼리프와의 명확한 연관성을 보여준다.[67]
알모라비드 왕조는 검은색(al-aswad|ar)을 포함한 압바스 왕조의 모든 상징을 채택했으며, 이는 평화와 전쟁 시대 알모라비드 부족의 사회 문화 생활에 참여하게 되었다. 람투나와 마수파의 사막 부족들은 머리에 둘렀을 때 베일로,[68] 그리고 알안달루스 전투에서 전투 깃발로 검은색을 채택했다.[69]
후에 검은 깃발은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운동의 충돌과 봉기에 사용되었다. 알모하드는 알모라비드 권력에 맞서 흰 깃발을 채택했고,[70] 마그레브의 바누 가니야와 알안달루스의 후디드가 일으킨 주요 반 알모하드 반란은 초기 알모라비드 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압바스 왕조와의 연관성을 확인시켜 주었다.[71][72]
5. 문화
무라비트 왕조의 정복은 무슬림 스페인(알안달루스)의 재편을 가져왔다. 유수프 이븐 타슈핀 가문과 람투나인 부족 출신 엘리트들은 알안달루스에서 별개의 신분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법을 따랐고, 베일을 착용했다. 무라비트인들은 알안달루스에 많이 정착하지는 않았지만, 정착한 이들은 거만한 전제정을 실시한다는 평판을 얻었다.
무라비트 왕조는 마그레브에서처럼 현지 종교 엘리트층의 지지와 협력 없이는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종교 엘리트들은 말리키법에 대한 엄격한 해석을 지지했고, 이는 무라비트 왕조에 의해 타이파 왕들의 도덕적 해이로부터의 변화로 여겨졌다. 무라비트 왕조의 승리는 코르도바 칼리파국 붕괴 이후 타이파 왕들과 권력 다툼을 해온 도시 엘리트층의 승리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알안달루스의 도시들에서는 통치가 여러 평의회의 감독을 받았는데, 이 평의회는 무라비트 왕조와 알안달루스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민사 재판은 알안달루스 원주민 카디가, 군사 권력은 타슈핀의 혈족이 장악했다.
무라비트 왕조는 청교도적인 근본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는데, 특히 기독교도나 유대인 신민들에 대한 태도에서 그러했다. 딤미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야 했고, 무슬림과 구분되는 의복을 착용해야 했으며, 신중하게 처신해야 했다. 중세 스페인 역사 연구자들은 무라비트 왕조를 '비관용적', '근본주의적', '청교도적'이라고 묘사하며, 타이파 시대의 문화를 압살한 속물들이라고 기술해 왔다. 역사가들은 베르베르인을 비난하며 무라비트 왕조와 문화 간의 관계를 무시해온 후대 안달루스 문필가들의 반베르베르적, 반무라비트적 편견을 수용해 왔다. 알모라비드파가 문화를 지원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지원이 종교 관련 학문과 말리키법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서구 학자들은 그들의 지적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슬림 백성들에게도 엄격함이 적용되었고, 비말리키 무슬림학파와 비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이슬람 사조에도 억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이슬람의 통일이라는 이상에 집착했고, 1098년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지배자 알 무스타지르의 신하를 자처하며 서쪽에서 그를 대신해 지배하는 총독이라는 직함을 부여받았다.
무라비트 왕조가 적극적인 박해를 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박해를 하게 되었을 때는 이슬람법을 근거로 정책을 정당화하려 했다. 비무슬림에 대한 알모라비드파의 정책은 반딤미적 적대감이 아니라 이슬람법을 지키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말리키 파키들의 권력에 의해 강요되었다. 알안달루스와 마그레브의 여러 도시들에서 카디(법관)로 임명된 보수적 법률가들은 비타협적 법 해석을 대중에게 강요하려 했다. 아부 하미드 무함마드 알 가잘리는 철학에 대한 공격과 수피 신비주의에 대한 지지로 유명했다.
알안달루스인들은 타이파 왕들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무라비트파를 택했다. 무라비트 왕조가 알 안달루스 침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파트와를 구한 것은 정복에 신성의 광채를 씌우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권위와 이데올로기를 알 안달루스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무라비트 왕조의 매력은 그들이 알안달루스인들을 기독교도들로부터 보호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1120~1130년대에 무라비트 왕조가 군사적으로 패한 뒤 여론이 악화되었을 때 말리키 법률가들은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말리키 종교 엘리트들의 인기는 이미 하락하고 있었으며, 울라마와 일반 대중 모두 수피주의를 비롯한 이슬람에 대한 신비주의적 접근 방식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신비주의 신앙은 10세기 초부터 힘을 얻고 있었는데, 당시 유럽과 지중해 세계 전역의 기독교와 무슬림, 유대인 사회 모두를 휩쓸고 있던 천년왕국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무라비트 왕조 치하에서 소각 대상이었던 알 가잘리의 책은 무라비트의 몰락에 기여하는 대신에 무와히드 왕조의 지배를 가져오게 될 종교적, 정치적 저항의 핵심을 이루게 될 알 안달루스 금욕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무라비트 왕조의 지배에 대항해 들고일어난 무슬림들은 기독교도 지배자들을 후원자와 동맹, 보호자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들은 이제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로 보기보다는 이슬람에 대한 상반된 비전 간의 충돌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기독교도 제후들은 이 반무라비트 감정을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려 했다. 1130년대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는 사라고사 타이파 왕국이었던 영토를 정복한 뒤, 무슬림 대중에게 계속 신민으로 남아 달라고 호소해 동의를 얻어냈다. 대신에 그들에게 인신과 재산의 보호, 종교적 자유와 계속해서 이슬람법 아래에서 살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그들을 기독교도들의 딤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 특히 상인이나 수공업자, 농민 등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그 땅에 남아 알 무다잔(남은 사람들)―무데하르로 불렸다.[155]
무라비트 왕조는 금욕적인 삶의 공간인 리바트 수행자들이 중심이 된 종교 운동으로 일어선 정권이다. 이 종교 운동은 말리크파 법학자 이븐 야신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으며, 왕조 내에서는 말리크파 법학이 공인된 학문으로서 번영하였다. 카디 이야드나 이븐 루슈드 자드(이븐 루슈드의 할아버지) 등이 유명하다. 한편, 동방에서 유입된 알가잘리의 사변 철학은 이단적 사상으로 탄압하였다.
무라비트 왕조의 군주들은 압바스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칼리프가 사용한 칭호인 “아미르 알 무미닌(신도들의 지도자(아미르))”과 유사한, “아미르 알 무슬리민(무슬림들의 지도자(아미르))”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139]
모로코 문학은 무라비트 왕조 시대에 번성하였다.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세비야의 전 타이파 통치자 알 무타미드 이븐 아바드를 모로코로 망명시키면서 문화 교류가 가속화되었다.[236] 이븐 하이얀, 알 바크리, 이븐 바삼, 알 파스 이븐 카칸 등은 모두 이 시대의 인물이다. 유수프 이븐 타쉬핀 통치 아래 페스에 104개의 제지 공장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235]
5. 1. 종교
알모라비드 운동은 말리키 학파에 영향을 받은 보수적인 이슬람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73] 모로코 출신의 말리키 학자 아부 임란 알파시의 저술은 야히야 이븐 이브라힘과 초기 알모라비드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74][75]
12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대리석 묘비가 많이 남아있다. 이 묘비들은 알모라비드의 지배 아래 번영했던 항구 도시 알메리아(Al-Andalus)에서 제작되었다. 묘비는 현지에서 채굴한 마카엘(Macael)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쿠피체(Kufic) 문자가 새겨져 있고, 때로는 식물이나 기하학적 모티브로 장식되어 있다.[78] 묘비에 새겨진 비문은 다양한 직업의 남녀 여러 개인에게 헌정되어 있으며, 비교적 저렴했음을 알 수 있다. 묘비는 직사각형의 스텔레 또는 ''mqabriyya''(마라케시의 사아디드 묘(Saadian Tombs)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 형태이다. 이들은 서아프리카와 서유럽 전역의 많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광범위한 대리석 산업과 무역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여러 조각들은 후대의 약탈을 통해 얻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알-안달루스 외부에서 발견된 가장 화려한 묘비 중 일부는 아프리카 사헬(Sahel) 지역의 가오-사네(Gao-Saney)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알모라비드의 영향이 아프리카 대륙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78]
무라비트 왕조는 금욕적인 삶의 공간인 수도원이자 종교 시설, 대외적으로는 이교도에 대한 최전선 기지이자 군사 시설이기도 한 “리바트”가 왕조명을 나타내듯이, 리바트의 수행자(무라비트)들이 중심이 된 종교 운동에 의해 일어선 정권이다. 이 종교 운동은 말리크파 법학자 이븐 야신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으며, 왕조 내에서는 말리크파 법학이 공인된 학문으로서 번영하였다. 카디 이야드나, 11세기 전반에 코르도바(스페인)의 대카디로서 활약하여 말리크파 법학사상 가장 권위 있는 학자 중 한 명이 된 이븐 루슈드 자드(이븐 루슈드의 할아버지) 등이 유명하다. 한편, 동방에서 유입된 알가잘리의 사변 철학은 이단적 사상으로 탄압하였다.
무라비트 왕조의 군주들은 압바스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칼리프가 사용한 칭호인 “아미르 알 무미닌(신도들의 지도자(아미르))”과 유사한, “아미르 알 무슬리민(무슬림들의 지도자(아미르))”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139]
5. 2. 예술
케임브리지 대학교 역사 교수 아미라 베니슨은 무라비트 왕조 시대의 예술이 '여러 지역을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통합하고 그 결과 광범위한 지역에서 알안달루스-마그레브 양식을 발전시킨 것'과 '예술 후원자였던 산하자 통치자들의 취향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211] 또한 베니슨은 로버트 힐렌브랜드가 전 세계 이슬람 미술을 고려할 때 알안달루스와 마그레브의 예술을 국지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무라비트 왕조의 '금욕적'이고 '광신도적'인 열정을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라고 치부한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211]
보수적인 말리키파 이슬람 법학을 신봉했던 무라비트인들은 알안달루스 타이파 왕국의 퇴폐적인 이베리아 무슬림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210] 그러나 왕조 후기에 발견된 알메리아 기념물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라비트인들은 알안달루스의 문화를 수용하며 태도가 바뀌었다.[210]
무라비트 왕조의 대표적인 예술 작품으로는 코르도바에서 생산된 정교한 민바르, 알메리아의 대리석 조각상과 묘비, 말라가 및 세비야의 고급 직물과 고급 도자기 등이 있다.[211]
12세기 전반부터 제작된 많은 무라비트 대리석 부조들이 잘 보존된 채로 발견되어 이들의 예술 분야를 잘 보여준다. 무라비트 왕조 치하 알안달루스 항구 도시였던 알메리아에서는 주로 대리석 관련 예술품들이 제작되었는데, 장인들은 현지의 마카엘에서 채굴한 대리석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었으며, 때로는 식물이나 기하학적인 문양 모티프로 장식되거나 쿠픽 캘리그라피를 새기기도 했다.[213]
5. 2. 1. 대리석 조각
무라비트 왕조 시대에는 직물 외에도 코르도바에서 제작된 정교한 미흐랍과 알메리아의 대리석 분수, 묘비 등 대리석을 이용한 조각 예술이 발달했다.[75]
5. 2. 2. 직물
알모하드 운동의 지도자 이븐 투마르트가 마라케시의 대모스크에서 술탄 알리 이븐 유수프가 "호화로운 비단 겉옷을 입고 앉아 있다"고 비판한 기록은 무라비트 왕조 시대 직물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80]
무라비트 왕조 시대의 남아 있는 직물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활용되었다. 레온의 산 이시도로 성당의 성물함, 툴루즈의 생 세르냉 대성당의 카수블레, 킨타나오르투뇨(부르고스 근처)의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성당의 카수블레, 산 페드로 데 오스마의 수의, 그리고 동쪽 피레네 산맥의 튀르 교회에서 발견된 조각 등이 그 예이다.[80] 이 직물들 중 일부는 쿠피체 또는 "히스파노-쿠피체"로 짜여진 글씨가 특징이며, 문자가 때때로 장식적인 식물 모양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카수블레가 그러한 예 중 하나이며, 비단과 금실로 만들어졌고 12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0] 산 페드로 데 오스마의 수의는 "이것은 바그다드에서 만들어졌다"는 비문으로 유명한데, 이는 수입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직물은 알메리아와 같은 지역에서 생산되었지만 동방에서 수입된 것을 모방하거나 바탕으로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80] 심지어 잠재적 판매자들에게 가치를 과장하기 위해 고의로 비문을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다. 12세기 작가이자 시장 감독관이었던 말라가의 알-사카티[81]는 이러한 허위 비문을 만드는 행위를 금지하기 위한 규정이 있었다고 기록했다.[80] 이러한 비문으로 인해 이 직물들은 학계에서 "바그다드 그룹"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타일이 일관되고 예술적으로 풍부한 비단 직물 그룹으로, 알리 이븐 유수프의 통치 또는 12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80] 비문 외에도 산 페드로 데 오스마의 수의는 원형 장식 안에 사자 두 마리와 하피의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그리핀을 든 작은 사람들의 이미지가 전체 직물에 반복된다.[80] 생 세르냉 대성당의 카수블레 또한 그림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수평 띠에 반복되는 공작 두 마리의 이미지이며, 각 쌍 사이에는 식물 줄기가 있고 아래쪽에는 작은 쿠피체 비문이 있다.
동물과 인물의 이미지가 담긴 원형 장식의 규칙적인 격자 무늬와 그 사이를 채우는 추상적인 모티브의 장식 테마는 페르시아 사산조 직물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알모하드 왕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후대에는 이러한 구상적인 이미지가 있는 원형 장식이 점차 추상적인 원형 장식으로 대체되고, 비문 장식이 이전보다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80]
5. 2. 3. 서예 및 제본
무라비트 왕조 시대에는 도자기, 직물, 목공예 등 다양한 예술 분야가 발전했다. 특히 도자기는 이탈리아 피사에서 약 2,000개의 마그레브-알안달루스 도자기 그릇(바치니)이 발견될 정도로 활발하게 제작 및 수출되었으며, 이 그릇들은 교회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76] 무라비트 왕조는 쿠에르다 세카 기법을 사용한 다양한 도자기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금속 광택 유약을 사용한 광택기가 가장 고급품이었다.[76]
알모라비드 시대의 직물은 초기에는 안달루스 타이파 왕국들의 사치스러운 경향을 거부하고 말리키 학파의 이슬람 율법을 따르려 했으나, 후기에는 고급스러운 직물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알메리아 유적과 직물은 제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태도를 바꾸었음을 보여준다.[75] 알모하드 운동의 지도자 이븐 투마르트가 술탄 알리 이븐 유수프의 비단 겉옷을 비판한 기록은 당시 직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75]
알모라비드 시대의 직물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활용되었는데, 레온의 산 이시도로 성당, 툴루즈의 생 세르냉 대성당 등에서 발견된다.[80] 이 직물들 중 일부는 쿠피체 글씨가 특징이며, 때로는 장식적인 식물 모양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카수블레가 그 예시이며, 비단과 금실로 만들어졌고 12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0] 산 페드로 데 오스마의 수의는 "바그다드에서 만들어졌다"는 비문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알메리아 등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80] 이러한 비문들은 학계에서 "바그다드 그룹"으로 불리며, 알리 이븐 유수프 통치 시기 또는 12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80]
무라비트 왕조의 설교단(Minbar)은 상감 세공과 목각 조각의 뛰어난 작품으로, 기하학적 구성, 상감 세공 재료, 아라베스크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86][87][88]
5. 2. 4. 도자기
알모라비드 시대의 고급 도자기는 코르도바에서 제작된 정교한 미흐랍, 알메리아의 대리석 분지와 묘비와 함께 주요 예술 작품 중 하나였다.
5. 2. 5. 민바르
1137년에 제작된 마라케시 대모스크의 민바르나 1144년경 알 카라위인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는 민바르와 같이[221][210] 무라비트 왕조 시기에 만들어진 민바르는 그들 제국의 이슬람 순수성을 입증함과 더불어 우마이야 왕조의 역할을 계승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자신들이 알안달루스를 지배할 수 있도록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두 민바르 모두 기하학적인 구성, 상감 소재, 화려한 아라베스크 부조로 묘사되어 있는 마케트리(marquetry) 및 목재 장식품이다.[221][222][223]
5. 3. 건축
무라비트 시대는 모로코 및 무어 건축의 형성 단계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후 몇 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융성할 건축 양식의 많은 형태와 모티브를 확립하고 다듬었다.[224][225] 무라비트 왕조는 코르도바 칼리파국 시대에 발전한, 무겁고 정교한 과시용 알안달루스 장식 대신에 비율의 균형을 중시하는 장식들을 우선시했다.[226]
무라비트 왕조 부상 전, 서부 이슬람 세계에서 예술 생산의 중심지는 카이르완과 코르도바였다. 무라비트 왕조는 마라케시에 수많은 건축물들을 건설하여 건축 후원의 주요 중심지로 탈바꿈시켰고, 코르도바 대모스크나 사라고사 알자페리아 궁전 내부의 복잡한 아치 구조와 같이 알안달루스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였다. 또한 ''무카르나스''("종유석" 또는 "벌집")와 같이 동부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장식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227]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알안달루스를 장악한 무라비트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장인들을 북아프리카로 보내어 건축물 제작에 참여시켰다.[229] 알제 대모스크(1097), 틀렘센 대모스크(1136), 알 카라위인 대학 (1135년에 증축) 등은 무라비트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221] 특히 무라비트 쿠바는 마라케시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무라비트 기념물 중 하나로, 조각된 스투코 장식과 복잡한 아치 구조,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 돔이 어우러져 있다.[230] 증축된 알 카라위인 모스크 중앙에는 서부 이슬람 세계에서 무카르나스가 사용된 본격적인 사례가 있다. 무라비트 왕조의 건축가들은 무카르나스를 받아들여 예술작품으로서 미적 감각을 끌어올렸다. 오늘날 건축 역사가들은 무카르나스의 복잡성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다.[231] 무라비트 건축의 또 다른 특징은 늑재 돔(ribbed dome)인데, 10세기경 세워진 코르도바 대모스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돔은 장식되어 있으며, 12개의 별 문양을 그리는 여러 개의 교차된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뚫려 있는 공간들은 빛이 들어와 아치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조각된 아라베스크 장식을 선명하게 하여 건축물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232][230]
무라비트 왕조는 장식용이나 종교적인 기념물 외에도 여러 요새들을 건설했지만, 대부분 무와히드 칼리파국 및 후대 왕조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다만 몇몇은 계속 사용되거나 증축되기도 했다. 새로운 수도인 마라케시에는 처음엔 성벽이 없었고 '크사르 엘 하지르(''Ksar el-Hajjar'', 돌의 요새)'로 알려진 방어 요새가 있었다. 1126년경 알리 이븐 유수프는 무와히드 세력에 대응하고자 도시 주변에 판축 공법을 사용하여 토벽을 쌓았다. 이 성벽은 수세기 동안 무너지고, 복원되고, 때로는 부분적으로 확장되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마라케시 메디나(구시가지)의 방어벽으로 사용되고 있다. 메디나 정문을 포함하여 많은 성문도 이때 만들어졌다. 특히 서쪽 성문 중 하나인 '밥 두칼라'는 본래의 무라비트 건축기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233] 마라케시 남동부의 타스기무트 요새나 페스 북동부의 아마르그 고고학 유적지 또한 무라비트 왕조가 건설한 요새이다. 틀렘센의 성벽 또한 무라비트 왕조가 건설한 것이다.[224]
알리 이븐 유수프의 치세에 무라비트 건축은 정점에 달했다. 그는 '크사르 엘 하자르' 남쪽(쿠투비야 모스크 자리)에 대궁전과 왕실 저택을 새로 건설했다. 이 궁전은 나중에 버려진 이후 무와히드 왕조의 카스바로 대체되었지만, 20세기에 일부 유적들이 발굴되어 연구 중이다. 이 유적지는 모로코에서 최초의 리야드식 정원(정원을 4등분하여 꾸미는 양식)을 건축한 사례로 알려져 있다.[224]
1960년, 치차우아 인근에서 발굴된 유적지에서는 무라비트 시대 또는 그 이전에 건설된 복합 단지 또는 정착지가 발견되었는데, 내부에는 수많은 주택, 급수 시스템, 두 개의 하맘(목욕탕)과 모스크가 있었다. 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많은 조각들은 라바트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초서체 아랍어 및 쿠픽 문자, 팔메트, 아칸투스 잎과 같은 식물 모티브가 특징인 스투코였다.
5. 4. 문학
무라비트 왕조 시기에는 모로코 문학이 번성하였다. 무라비트 왕조의 모로코와 알안달루스 통일은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세비야의 전 타이파 통치자 알 무타미드 이븐 아바드를 모로코로 망명시키면서 시작되었고, 이는 문화 교류를 가속화시켰다.[236]
이븐 하이얀, 알 바크리, 이븐 바삼, 알 파스 이븐 카칸 등은 모두 이 시대의 인물이다. 모로코의 역사학자 무함마드 알 바누니(محمد المنوني)는 유수프 이븐 타쉬핀 통치 아래 페스에 104개의 제지 공장이 있었다고 기록했다.[235]
말리크파 법학자 이븐 야신의 교설에서 시작된 종교 운동으로 일어선 무라비트 왕조는 말리크파 법학을 공인된 학문으로 번영시켰다. 카디 이야드나 이븐 루슈드 자드(이븐 루슈드의 할아버지) 등이 유명하다. 반면, 동방에서 유입된 알가잘리의 사변 철학은 이단적 사상으로 탄압하였다.
6. 군주 목록
(또는 1056년)[114]